최울가의 작품세계 - 원시적인 자연미에서 도회지의 정서 및 세련미로 이행 - 신항섭 (미술평론가)
- woolgachoi
- 2017년 1월 11일
- 4분 분량
전자과학이 주도하는 21세기의 인류문명은 과연 인간에게 항구적인 행복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수명이 늘어나고 생활이 편리해진다는 점에서는 환호하는 이들이 많겠지만, 상대적으로 인간성 상실을 걱정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다시 말해 인간 삶의 상당 부분이 전자문명에 의존하게 됨으로써 인간 본연의 자연성 상실을 우려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예술뿐인지 모른다. 예술이야말로 전자문명에 취해 점차 비인간적이 돼가는 현대인의 메마른 감정을 치유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일 수 있기에 그렇다.
최울가는 일찍이 그림을 통해 차가운 현대인의 의식 및 감정을 원초적으로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왔다. 원시적인 인간의 삶을 상징하는 암각화나 동굴벽화에 근사한 조형언어를 통해 우리의 본성을 일깨우려는 것이었다. 학습에 의한 일체의 기교를 배제한, 단순히 삶을 영위하기 위한 주술이나 기원이 담긴 원시적인 그림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예술이 지향하는 목표가 아니었을까. 그러기에 가능한 한 형태는 단순하고 간결하게 처리했고, 색채는 시각적인 선명성 및 재료의 순수성을 살리는 방법을 택했다.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초기 작업은 대체로 거칠고 두터운 질감과 지극히 원시적인 최소한의 이미지만을 취했다. 색채를 제거하면 원시인의 그림처럼 조야한 야성미가 그대로 드러나는 형편이었다. 더구나 두텁고 굵은 선에 의해 이끌리는 형상은 세부를 생략함으로써 개략적이었다. 뿐더러 어떤 목적성을 갖는 원시인의 그림처럼 특정 부분을 과장하거나 생략하여 형태는 왜곡되기 일쑤였다. 이와 같은 초기의 조형적인 특징은 그의 작품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기본적인 골격으로 자리하게 된다.
1980년대의 작품은 물상의 형태는 난해한 편이었다. 형태가 단순화되었다지만 왜곡 변형함으로써 친절하지 못했다. 어느 면에서는 학습을 받지 못한 어린이의 그림처럼 지극히 간결하고 단순했다. 어린이의 그림이 단순하다고는 하지만 시각적인 이해가 쉽지 않듯이 그의 작품 또한 그러한 조형적인 특징을 보여주었다. 비례가 맞지 않고 형태는 왜곡되었으며, 표현방법은 직설적이었다. 인물을 화면 가득히 채우는 방식도 그러하거니와, 단순하고 강렬한 윤곽선으로 형태를 만들기에 시각적인 압박감이 컸다.
그런가 하면 나이프에 의한 점묘법과 같은 채색기법으로 인해 전체적인 이미지는 중간색조가 지배하는 형국이었다. 다만 형태를 장악하는 윤곽선이 두텁고 힘차며 간결하기에 시각적인 인상은 강렬했다. 그러나 왜곡 및 변형으로 인해 인물의 경우 구체적인 형태를 복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어떤 특정 상황이나 배경을 제시하지 않고 단지 인물의 형태만을 보여주는 식이어서 내용을 파악하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어린이의 그림이 형식보다는 내용을 중시하는데 비하면 그의 그림은 형식이 우선한다. 그의 그림이 아동화와 다른 점은 여기에 있다. 위에 기술한 몇 가지 조형적인 특징은 곧바로 형식미를 결정한다. 어린이 그림과 같은 간결하고 단순한 윤곽선에 의해 지탱되는 형태미는 호소력이 강하다. 물론 군더더기 없이 형태의 골격만을 보여줌으로써 시각적인 설득력이 있다. 그 자신이 전하려는 메시지를 정확히 이해시키는 데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이르면 형태 중심에서 색채 중심으로 이동하는 경향으로 변화한다. 다시 말해 점묘법과 같은 색채 배열방식을 벗어나 순색에 의한 색면이 화면을 지배하게 된다. 따라서 작품의 전체적인 인상은 밝고 화려하고 강렬하여 자극적이다. 가능한 한 혼색을 지양하고 순색을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이었다. 이는 색면 효과에 다른 변화인데, 형태 또한 이전보다 한층 뚜렷해졌다. 한마디로 색채에 의해 원초적인 야성이 그대로 노출되는 상황이다. 원색적인 색채이미지는 감정에 직접적으로 반응하고 작용하게 마련이다. 화려하고 밝은 원색은 닫힌 의식 및 감정을 열어주는 기능을 한다. 시각적인 개방과 함께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하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자연과 마주했을 때의 인상과 유사한 감정의 반응인지 모른다.
실제로 1990년대에는 이전의 인물 중심에서 자연과 일상적인 에피소드를 제재를 바꾼다. 소재 및 제재가 바뀜으로써 내용도 그에 따르게 된다. 자연을 제재로 하는 경우 소재가 다양해짐에 따라 내용 또한 풍부해진다. 일상적인 에피소드도 마찬가지로 다양한 소재 및 내용으로 화면은 풍성하다. 그림의 형식은 여전히 원시적인 이미지 또는 아동화와 유사한 형태해석이다. 소재가 다채로워짐에 따라 구성도 자못 화려하다.
여기에서 그는 소재의 형태해석은 물론이려니와 소재의 배치 및 구성에서 현실적인 공간개념을 무시하고 있다. 그래서 화면 구성은 현실적인 공간감과는 다른 우주의 무중력의 세계처럼 자유자재한 모양이다. 전후좌우상하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만유인력의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 절대자유의 시공간을 향유한다. 이는 역시 원시인의 암각화 및 동굴화의 형식에 비유할 수 있다. 이러한 공간설정은 그의 작품이 윤리와 도덕 그리고 질서를 강요하는 인간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초월적인 세계를 지향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초월적인 세계란 사회적인 관계가 복잡해지기 이전의 원시인들의 삶의 양식과 무관하지 않다. 세상과 마주하는 그의 작가적인 관점은 오직 자연의 법칙에 따를 뿐인 원시인들의 삶의 양태를 겨냥하는 것은 아닐까. 강렬한 원색이 주는 색채의 순수성을 통해 원초적인 인간감정의 회복을 기대하는 것은 또 아닐까.
2000년대에 들어서면 색면은 일시에 사라지고 대신 드로잉에서 표현의 순수성을 찾으려는 일련의 시도가 진행된다. 유채나 아크릴 또는 크레파스 및 오일스틱 따위를 재료로 하는 그의 작업은 선에 의해 주도된다. 선은 형태를 결정하는가 하면, 때로는 면의 경계를 넘나들기도 한다. 이 시기에 와서는 선이 곧바로 소재 및 대상의 형태와 색채이미지가 분리되지 않고 일체가 되는 일이 빈번하다. 즉 드로잉의 개념을 적용함으로써 선과 면 또는 형태가 저마다 독립적인 존재방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존재방식 자체의 구분이 의미가 없는 일체화된 조형개념을 따른다. 지극히 간결한 선묘방식, 즉 에스키스에 가까운 드로잉의 개념에 합당한 이미지에 그치는 까닭이다.
그는 여기에서 부분적으로 평면적인 색면을 도입하는가 하면 캔버스 면 위에 검정색 또는 흰색을 두텁게 칠한 다음 마르기 전에 오일스틱이나 크레파스 따위로 형태를 그려나감으로써 분청사기의 선화 또는 각화를 연상케 하는, 음각 형태의 화면구조를 드러낸다. 이러한 형식은 드로잉의 가벼움을 보완하는 장치로서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해 선묘작업이 주는 시각적인 순수함 및 경쾌함에도 불구하고 일회적인 필선이 주는 가벼움을 떨치기 어렵다. 드로잉에 가까운 선묘방식은 초기부터 일관된 형식논리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어쩌면 문인화의 일회적인 운필과 유사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이 일회적인 운필의 묘는 2000년대 작업에서는 아주 선명하게 부각된다. 캔버스 바탕을 덮고 있는 두터운 물감의 층이 마르기 전에 그어나가는 음각형태의 선묘방식이 그렇다. 단지 일회만을 허용하는 캔버스 바탕의 조건이 일회적인 운필을 결정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2000년대의 작업에서는 일회적인 운필이 청신한 이미지로 살아난다. 일회적인 운필에 호응하기 위해서는 모든 소재 및 형태를 간결한 선묘로 압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에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형상은 기호나 부호 또는 도상의 개념에 합당하리만치 간명한 이미지로 압축된다. 형태의 압축은 필연적으로 이와 같은 형식논리에 의해 해석된 독자적인 이미지로 귀결하게 된다. 그래서 그의 최근 작품은 일관된 조형적인 패턴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독자적인 형식미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소재는 저마다 고유의 압축된 이미지, 즉 기호나 부호 또는 도상의 이미지를 가진다. 이처럼 약속된 이미지를 가짐으로써 이들 이미지가 이합집산하면서 구성적인 작품의 형식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소재의 형상을 좇는 선묘는 직설적이고 담대하다. 애매하고 모호한 구석이 없이 명백하고 힘차며 솔직하다. 그와 같은 선의 형태에서는 시각적인 쾌감이 느껴진다. 애써 원시적인 그림처럼 자연스러워져야 할 필요도 없어졌다. 속도감 있고 경쾌하면서도 리드미컬한 선의 흐름이 느껴지는 것도 자신의 작업에 익숙하다는 반증이다. 이제는 그린다는 데 대한 부담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느낌이다. 너무 도식적이지 않느냐는 반응이 있을 수도 있지만, 오히려 형식미의 완결로 인해 전체적인 인상은 담백하면서도 세련되어 있다.
이제는 자연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미적 감각의 완숙을 의미하는 세련미와 더불어 도회지적인 정서에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여전히 원시적인 속성은 간직하고 있다. 그림의 형식미와 관련해서 보더라도 군더더기 없는 조형적인 질서를 갖추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 최근의 작품은 야성을 잃지 않는 가운데 도회지적인 세련미로 귀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소재 및 대상의 변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일상적인 삶의 주변에서 취하는 소재 및 내용이 이를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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