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역적 시간과 일상의 형해(形骸) - 유근오(미술평론)
- woolgachoi
- 2017년 4월 12일
- 5분 분량
우리와 중국이 해시계를 사용하고 있을 때 서구 열강들은 14세기부터 현재 사용하는 시계의 선조격인 기계시계를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시간 대역의 구획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동양과 서양의 시간 개념에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고 할 수는 없다. 어느 문명에서든 시간의 개념 곁에는 고유한 시간 측정방식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기준이 다르고, 사용하는 양태는 다르더라도 그 문명 나름의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지역과 국가간의 상이한 시간 대역은 수 많은 문제점을 낳았다. 당연히 세계 표준시가 요구되었다. 표준시가 범 지구적으로 적용되기 시작된 것은 1912년이다. 하지만 이 체계가 실용적이라는 점은 명백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만족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여전히 다양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뉴턴의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시간은 입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뒤르켐(Durkheim)은 시간의 사회적 상대성을 주장하면서 서구 중심의 시간관을 공격하였고, 아인슈타인은 시간의 불가역성을 부정하였다. 또한 물리학적으로 시간이 균질적인가, 비균질적인가의 논쟁이 끝나지 않았으며, 아울러 공적 시간과 사적 시간의 불일치에서 오는 갈등도 해소되지 않았다. 결국 근대적 실용성에 의해 시간의 사회적, 물리적, 심리적 상대성은 무시된 것이다. 필자가 시간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시간과 최울가의 회화가 매우 많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벨록(Belock)은 조지프 콘래드(Joseph Conrad)가 1907년에 발표한 소설 「밀정 The Secret Agent」에 나오는 러시아 아나키스트이다. 영국에서의 그의 임무는 자오선의 기준인 그리니치 천문대를 폭파하는 것이다. 공적 시간이 갖는 권력적 속성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생생한 상징으로서, 무정부주의자의 공격 목표로서 벨록에게 그보다 더 적절한 대상은 없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콘래드는 결국 공적 시간과 사적 시간이 빚는 팽팽한 갈등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미술평론가 나카하라 유스케는 일전에 최울가의 회화를 ‘아나키적인 세계’라고 평한 적이 있다. 물론 여기서 아나키적 세계란 화면에 등장하는 다양한 이미지들이 무질서를 표방한 듯 중요성이나 크기의 구별, 비교의 기준이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또 다른 해석도 역시 가능할 것 같다. 최울가는 물론 정치적 아나키스트와는 전혀 관계가 없지만, 미학적으로 이 시간을 문제삼고자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최울가에게 있어 시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비균질적이며 가역적이다. 그의 화면 위에서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로 응축되거나 뒤죽박죽 뒤엉켜 있다. 그래서 시간은 현재가 과거를 앞지르기도하고 꿈이나 기대 같은 미래가 과거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기도 한다. 예컨대 애닯은 과거의 사건이 현재로 전이되면서 마치 오늘 일어난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지고, 반면에 오늘 일어난 일은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파편화되어 나타나면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자아나게도 한다. 이렇게 시간의 엄격한 질서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잠시나마 모든 분별에 무감각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경우 일상의 순간들을 응시하고 있으면 알맹이는 황급히 빠져나가 형해화 되어버리므로, 그 알맹이를 억세게 움켜쥐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최울가의 화면은 살점을 철저하게 발라먹은 생선 가시처럼 앙상한 선(線)적 형상으로 가득하게 되는데 이는 지극히 당연하다. 바로 이 형태가 최울가 회화의 존재방식이다. 대부분의 회화는 평면공간 속에서 발생하므로, 지나간 사건의 경험, 잃어버린 시간의 공허함, 그리고 함께 삶을 공유했던 사물, 동물 등과 가졌던 환희와 오욕의 시간을 그려내기는 힘들다. 하지만 최울가는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ourst)의 말에 공명이라도 하듯이, 말하자면 회화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을 하나의 장소를 점유하는 존재, 그러니까 공간 속에서 할당되어 있는 제한된 장소보다는 훨씬 넓은 장소(……) 즉 시간이라는 차원을 점유하는 존재로 그릴 것’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려진 대상들의 공간적 살점들을 다시 회복하려 애쓰는 것은 헛수고일 뿐이다. 선적인 표현방식만이 공간을 점유하려는 욕망을 이겨낼 수 있으며, 그러한 비균질적인 시간은 자명종, 별, 화분, 과일, 개와 고양이, 식탁, 텔레비젼, 고물 라디오 등의 선형으로 공간을 점유한다. 그가 거친 드로잉 형식을 취하는 이유도 그것들을 단지 물질적인 형태로만 남기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그의 그림에는 시계의 문자반이 수시로 등장한다. 적어도 그것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의미다. 이처럼 존재와 시간의 만남은 다분히 명시적이다. 하지만 자명종 시계의 문자반을 조금 유심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보편적인 문자반과는 무엇인가가 다르다. 1, 2, 3하는 식으로 이어지는 시간대의 질서가 무시되는 것은 기본이고 13시, 14시로 끝나기도 한다. 그 주변에는 시계소리의 청각적 이미지로 보이는 뚝뚝 끊어진 선묘들이 난무한다. 이것은 단순한 실수이거나 자유분방한 표현방식 중에 우연히 나타난 이미지는 분명 아니다. 사실 어느 누구도 시간의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이자 덫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붙잡을 수 없는 흐름이며 서글픈 욕망이다. 그러나 이런 공적인 시간을 망각하는 이미지는 연속이라든지 구분된다든가 하는 전통적인 시간과 공간 경계방식을 사라지게 한다. 이것은 결코 현실로부터 비현실로의 허황된 이행이 아니라 아인슈타인이 말한 가역적 시공간의 출현이다. 결국 그의 회화는 시공간의 독특한 에크리튀르(écriture) 속에 고정되어 있다. 그가 그려내는 자잘한 일상은 권태로 찌든 우리의 삶을 환기시키기도 하지만, 늘 함께하지만 보지도 느끼지도 않았던 사물과 사건들의 숨겨진 미적 감성들을 들추어낸다. 최울가의 이런 의식은 아마도 작가가 서울에서 파리로, 파리에서 뉴욕으로 이어지는 작업활동에서 획득된 것이 아닌가 싶다. 거기에는 시간과 공간이 관련되어 있음을 이내 간파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서울에서 파리로 가는 비행기 속에서 하루를 두 번 경험하기도 한다. 공적인 시간과 사적인 시간이 충돌하는 지점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손목시계의 문자반이 정확한 시간을, 달력 위에 하루하루가 분명히 기록되어 있어 보편적인 시간은 의심받지 않지만 심리적인 사적 시간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다.
최울가의 그림 속에는 두 가지의 태도로 짝지어진 여러 요소들이 공존하고 있다. 어린아이의 천진함과 어른의 지각적 세계가 그것이요, 원초적인 프리미티브즘과 현대적인 구성이 그것이요, 비균질의 드로잉과 균질적인 화면의 색채가 그것이요, 완성과 미완성의 범위가 그것이다. 이것들은 쉽사리 섞일 것 같지 않은 대립적 요소들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소홀히 하지 않으려는 듯 최울가의 화면 속에서는 함께 어울려 나타난다. 이것들을 한 마디로 축약하자면 절제와 자유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시각적 양상뿐만 아니라 청각적 양상도 개입한다. 이 고집스런 동반관계는 작가의 열정적인 흥분과 비범한 조형적 감각이, 일상에 관한 색다른 우의가 있다. 그의 작업을 추적해 보자면, 우선 그림의 바닥 면은 매우 신중하게 선택된 색채들-White, Black, Blue, Red, Grey로 공들여 균질하게 칠한 다음, 마치 본능적이거나 되는대로 그린 듯 사물과 동물의 형상을 자유분방한 선으로 그려나간다. 이 그림들은 마치 어린아이가 공책에 흔해빠진 이야기를 조악하게 그려놓은 데생을 확대해 놓은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종종 그것은 우스꽝스럽고 소란스럽게 과장된 낙서화(graffiti)와 한 쌍을 이루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토록 생생하고 환희에 찬, 때로는 그린다는 원초적인 행위에 충실한, 때로는 소박하거나 특이한, 때로는 일기를 쓰는 듯한, 하지만 애초부터 점잖은 미술은 고려하지 않은 듯한 그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최울가 회화의 몇 가지 본질적인 가치들을 발견한다. 맑은 영혼, 자유, 상식을 뛰어넘는 상상력, 기술적 초월성, 순수, 예술적 에너지 따위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것 만으로 그의 그림이 갈무리되지는 않는다. 그랬다면 아마 그의 작품은 주지하다시피 원생미술(art brut), 원시미술(primitive art), 낙서화(graffiti), 자유구상(figuration libre) 쯤으로 묶여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런 흐름들 밖에서, 특히 근작에 자주 등장하는 양상들을 주의 깊게 살펴봄으로써 차이를 확인 할 수 있다. 우선 꿰맨 듯한 사각의 색면들이 여기저기 화면을 침범하면서 기존의 느낌을 반전시킨다. 이 색면들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이 색면들이 자유분방하고 다소 무질서해 보이는 선묘들을 제어하면서 긴장과 이완의 역할을 구축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 색면들이 스케치 북을 연상시키면서 화면을 드로잉 내지는 선형상 (先形像, pre-figuration), 즉 작품이 완성되기 이전의 예비적 단계로 환원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정확하게 말해, 완성에 이르지 않은 것(non-finito)이 아니라 완성의 결여태로서의 ‘단편’을 의식적으로 만들고자 한다. 이는 불충분한 표현이 아니라 미완성이 지닌 대담한 표현만이 자아낼 수 있는 극적인 울림, 즉 그의 작품이 지닌 창작의 가장 근원적인 의지를 우리에게 직접 제시하는 것이다. 실제로 최울가의 작품이 ‘아나키적 세계’, ‘원초적 순수’, ‘원시주의’라는 평을 듣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또한 그의 화면은 두꺼운 캔버스의 옆면까지 지속되면서 2.5차원의 공간이라는 해석이 가능한 세계로 확대되며 액자 따위로 제한되지 않는, 결국 그 무엇으로도 구속 할 수 없는 회화의 자율성을 구가하고자 한다.
작가는 ‘사람은 하루 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을 잊어버렸다’고 말한다. 물론 현실과 모순된 듯한 이 말은 시간의 신비스런 특권을 박탈하려는 의도이며, 신화화된 일상을 되돌아 보려는 의도다. 여기서 굳이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말을 빌리자면, 현대의 신화란 ‘누구나 당연시 하고 넘어가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자명한 것이어서 아무도 의문부호를 달지 않는 즉, 일상도 여기에 속한다. 최울가의 회화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문제를 제기하지 않지만 그래도 역시 현실보다는 더 성찰적일 수 있다. 일상 생활의 소박한 사물들과 애완 동물들, 예컨대 어항, 물고기, 개와 고양이, 선인장, 술병, 자동차, 시계, 수박 등에 대한 작가의 관점은 평범치 않다. 그의 관점은 일상이란 시작과 동시에 우리들 시야에서 벗어나며, 이 일상을 대변하는 것들은 너무 진부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에게는 특권을 부여 받은 사물이나 인물의 세계를 화면이라는 협소한 공간에 특수하게 구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는 사물들 안에 현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 어떤 도약이 있다. 본래의 형상은 거의 와해되어 기호가 되어버린 듯한 이 일상의 등가물들을 통해 일상의 신화를 벗겨내는 것은 오히려 일상에 대한 잊혀진 역사의 회복을 반증하는 것이다. 최울가의 작품 하나하나는 작가의 일상을 지칭한다. 더불어 우리는 작가의 일상을 통해 우리의 일상을 공감한다. 박제된 일상의 굴레를 벗고 살아 숨쉬는 일상을 대면하는 것, 이것이 최울가 회화의 진면목이다. 사물의 재현적 묘사를 넘어서 형식에 구애 받지 않는 선과 색채로 표출된 그의 회화는 엄청난 예술적 에너지의 응집을 느끼게 한다. 우리의 일상에서 동시대 인간 삶의 보편성을 이끌어내어 생기를 불어넣는 최울가의 그림들은 바로 작가 자신의 실존적 에너지의 구체적 흔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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